추사 김정희, 글씨를 보는 법
뜻을 몰라도 획은 읽힙니다
줄이 반듯하지 않은 글씨
김정희(1786-1856)의 글씨는 한자를 읽지 못해도 눈에 걸립니다. 한 글자 안에서 획의 굵기가 크게 달라집니다. 칼로 그은 듯 가는 획 옆에 먹이 번질 만큼 두꺼운 획이 놓입니다. 글자마다 크기와 기울기가 달라 줄도 반듯하게 서지 않습니다. 뒷사람들은 그의 호를 따 이런 글씨를 추사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오래된 비석에 남은 옛 글자를 찾아다니며 획의 근원을 연구했습니다. 1816년에는 북한산 비봉의 비석이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내기도 했습니다. 반듯한 서체를 흉내 내는 대신 옛 글자의 뼈대를 가져와 자기 글씨를 만든 셈입니다. 그러니 이 전시에서는 문장의 뜻보다 획이 어디서 시작해 어디서 멈추는지를 먼저 보면 됩니다.
편지로 이어진 학문
1809년 스물넷의 김정희는 사신으로 떠나는 아버지를 따라 연경(지금의 베이징)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일흔여덟의 옹방강과 마흔여덟의 완원을 만나 금석문을 함께 보고 필담을 나눴습니다. 완원에게서는 완당이라는 호를 받았고 책과 글씨, 탁본을 얻어 돌아왔습니다. 귀국한 뒤로도 서신은 계속 오갔습니다. 다시 만나기 어려운 거리를 당시 학자들은 편지로 메웠습니다. 이 전시가 제목에 '동반자'를 넣은 것도 그래서입니다. 그의 학문은 혼자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오가는 편지와 사람들 사이에서 자란 것이었습니다. 곁에는 청나라의 벗만 있던 것이 아니라 불교를 함께 논하던 승려도, 중인 신분의 지식인과 예술가도 있었습니다.
제주에서 보낸 여덟 해
1840년 김정희는 제주 대정현으로 유배됩니다. 가시울타리를 두른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는 형벌이었습니다. 그렇게 햇수로 아홉 해, 만으로 여덟 해 삼 개월을 보냈습니다. 뭍에서 오는 것은 배편에 실린 편지와 책뿐이었습니다. 벗들이 보내온 그 꾸러미가 그와 바깥세상을 이어 주었습니다. 글씨가 크게 달라진 것도 이 무렵입니다. 남의 글씨를 본뜨던 자리에 자기 획이 들어섰습니다. 유배가 풀린 뒤에도 1851년 함경도 북청으로 한 해 남짓 다시 보내졌습니다. 만년은 과천의 초당에서 지냈고 봉은사 판전 현판을 쓴 사흘 뒤 일흔한 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불이선란도〉 한 점
이 전시의 대표작은 1850년대에 그린 〈불이선란도〉입니다. 종이에 먹으로 그린 난초 한 포기가 화면 가운데 옅게 놓이고 그 둘레를 김정희가 네 차례에 걸쳐 쓴 글이 채웁니다. 그림보다 글씨가 넓은 자리를 차지하는 셈입니다. 달준이라는 사람에게 그려준 그림입니다. 화면 맨 위 글에 "난초를 그리지 않은 지 스무 해인데 우연히 성품 속 하늘 이치를 그려냈구나"라는 대목과 "이는 유마의 불이선일세"라는 구절이 있어 그 이름이 붙었습니다. 붉은 도장이 여러 개 찍혀 있는데 그린 사람과 이후 소장한 사람들이 차례로 남긴 자국입니다. 화면 자체는 세로 55cm, 가로 30.6cm로 생각보다 작습니다. 2018년 손창근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고 2023년 보물로 지정됐습니다.

- ★official·국립중앙박물관 — 추사 김정희와 그의 동반자(ko)
- ★official·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 김정희필 불이선란도(ko)
- ★official·국가유산청 — 「김정희 필 불이선란도」 보물 지정 예고(ko)
- ★official·국립중앙박물관 — 손세기·손창근 컬렉션 기증(ko)
- ★official·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 김정희(ko)
- ★official·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부작란도(ko)